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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 와 신앙의 본질

에스더(은) 2016. 12. 18. 16:50

교회 와 신앙의 본질

 

교회 와 신앙

 

이 글은 지난10월30일,

연세대학교 ‘루스채플’ 의

한 모임에서 가졌던

신앙강좌의 내용을 요약,정리한것임. 
 
⊙서론;

본질(本質)은

사물과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성질을 뜻한다.

 

여기에 대해

변질(變質)은

그 본질이 상하거나

썩어서 바탕이 변한것이다.

따라서

본래의것이 딴것이 되는경우다.

 

본 강의에서

‘교회와 신앙의 본질’ 을 논하는것은

본래의것을 되찾고,

되돌아가서 ‘회복’ 을 기하기 위해서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먼저

하나의 성경적 기준을 설정한다면,

고린도후서 4장 18절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것은

잠시뿐 이지만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눈길을 돌리다’ 는

개역과 표준성경 번역에서는

‘바라다, 바라본다’ 로 되어있다.

 

이 말의 본래뜻은,

skopos 로서 ‘표적’을 보다,

어떤것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것에 대해

집중, 집착’ 한다는 뜻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것이 신앙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그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그것을 ‘바람’ 으로 설명하신다.

 

근자 우리앞에는,

보이지않는것을 추구하는

본래의 교회와,

보이는것을 추구하는

변질된 교회가 있다.

 

개신교의 원로이신

숙대의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부패하고 있는가.

 

지금 복음의 샤머니즘(미신)화가

광신적으로 진전되고 있어도

이를 분간할

영성과 지성을 다 잃어버렸다.‘ 고 질타했으며,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아편중독에 걸린것처럼

만신창이가 되어있어도

이제는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못하고 있다.‘ 고 고발한다.

 

상대적으로

보이는것을 추구하는,

변질된 교회가 더 많은게 사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법칙’ 에 따라

변질된 교회가

본래의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만큼

본래의것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교회 와 예배당


1. 교회 와 예배당.
신앙생활에서 ‘단어’ 는 매우 중요하다.

진리라해도

결국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한 단어가 가지는

고유의 뜻이 왜곡되면 내용도 왜곡된다.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교회’ 다.

 

사전적인 의미는,

기독교 공동체와 예배를 위한 건물이 교회다.

때문에

이 두가지 서로다른 개념은

하나로 섞여서 쓰이고 있으며

그만큼

큰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다른,

함께쓸수 없는 개념이다.

 

교회는

그 본래의 단어가 ekklesia 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 무리’ 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신앙공동체’ 가 곧 교회인것이다.

 

  신앙공동체

 

그리고

그 신앙공동체가 예배를 드리고

기타

조직적인 행사를 위해

사용하는 건물이 예배당이다.

 

이제는

이 서로다른 두 개의 단어를

분명하게

나누어 쓸때가 됐다.

 

큰 예배당이

큰 교회는 아닌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수도 있다.

 

둘이 섞일때,

맘모니즘-물량주의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현상이

변질된

교회들의 ‘기복신앙’ 이다.

 

예배당은 없어도

교회는 있을수있는게

기독교신앙내용이다. 

  교리


2. 교리-敎理-dogma.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의 원리와 이치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다.

 

대표적인것의 하나가

지금도 일부 교파가 주장하고 있는

‘축자영감설’ 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는 주장이다.

 

물론

거개의 교파가 주장하는

영감설-감동설이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로서

알수있는것은,

교리는

성경에 대한 상대적 인간의 주장’ 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교단, 교파가

그 교단과 교파의 이름으로

‘교리’ 를 말한다 해도

그것역시

인간의 ‘성경해석’ 인 것이다.

 

  성경해석

 

어떤 인간도

절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할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읽는사람에 따라

자기대로의 해석이

가능한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초상화’ 가 있다.

 

그러나

그 초상화가 아무리 오래된 것이고

유명한 것이라 해도

그건 단지

화가의 ‘상상화’ 일 뿐이다.

예수를 직접 본 사람도 없고,

예수의 사진은 더더구나 없다.

 

최근

예루살렘의 한 토목공사장에서

예수시대

유대인의 해골이 발견된 일이있다.

전문가들이

컴퓨터에 의한 최신공법과 기법으로

그 얼굴을 복원했다.

 

그 얼굴은

우리가 알고있는

예수의 초상화와는 전혀다른,

유대인의 평범하고

건강해 보이는 농부의 얼굴이었다.

 

교리에 얽매이고 절대시 하면

기독교는

계속 갈라질수 밖에없다.

 

그러나

어떤 교리라해도

그것이

성경’ 을 뛰어넘을수는 없다.

 

  성경해석

 

그래서

우리모두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모든교리에 대해

마음을 열고있어야 한다.

 

어떤

교리에도 종속될 이유가 없다.

 

모든 교리는

그 긍국적인 목적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돕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혜

 

3. 은혜.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장많이 듣고 말해지는 단어가

‘은혜’ 다.

 

그리고

이 은혜라는 단어만큼

크게

왜곡된 표현도 달리없을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은혜는 ‘도움을 베푼다’

사전적 의미로 쓰이고 있는게 사실이다.

 

일상에서

흔히 쓰고있는 말-언어는

언제나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은혜

 

은혜가

우리일상에서 쓰이는 내용 그대로

기독교

신앙용어로 전이된것도 사실이다.

 

놀라운 얘기이긴 하지만,
기독교인중

이 은혜라는 단어에 대해

정확한,

신앙적 답변을 할수있는 교인은 거의 없다.

 

우선

제대로 배워주지 않았고,

감동, 감격, 카타르시스를

은혜인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때 교회를 휩쓸었던

심령대부흥회’ 가 한몫을 한바있다.

 

심령대부흥회

 

은혜라는

신앙용어에 대해

이를

제대로 아는길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수있는 첫걸음이 된다.

 

성경에서

사용하고있는 단어는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있는

사전적 의미와는

그 근본에서 아주 다르다.

 

성서번역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기도 하다.

 

은혜는

그 원문이 xarisma 다.

이 단어의 어근은 xara,

‘기쁨’ 을 뜻한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깨달음에 대한 기쁨’ 이 xarisma 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깨닫는 기쁨,

설교를 들으면서 깨닫는기쁨,

기도하면서 깨닫는기쁨,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 다.

그리고

이 은혜는

거저받는것 이기에 ‘은총’ 이라고도 한다. 


  구원


4. 구원.
은혜와 똑같이

교인들이 제대로 설명못하는 단어가

바로

구원이다.

 

구원은 soteria 라고한다.

그 환경이

완전히 바뀐상태를 의미한다.

 

물에빠졌을때의 환경은

죽을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뭍으로 옮겨졌다면

그건 살았다는 의미다.

 

그만큼

전적으로, 질적으로

그 사람의 환경이 바뀐것이 곧 구원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거듭난다’ 로 표현했다.

 

  고린도 후서 4장16절

 

사울이

바울이 된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겉사람은 후폐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고후4장16절의 말씀이 그 뜻이다.

그래서

구원은 전향-轉向,

그 방향을 바꾸는것이다.

 

왼쪽으로 가던 사람이 오른쪽으로,

북쪽으로 가던 사람이 남쪽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것이 구원이다.

 

입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일상에서 전향이 없다면

그건 거짓이다.

 

쉽게말해,

구원-전향은 가치관의 변화다.

돈이 목적이었는데

그게

수단이 된 케이스가 구원이다.

 

내것이 아니라면

뭉치돈도

돌처럼 보여야 되는 수준이다.

 

구원은

일순간에 일어날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갈수도 있다.

 

전자는

쉽게 식을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않다.

날로 새로위지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신앙

 

진정한 구원은

성장하는 신앙’ 이다.

 

그 신앙이 크게 자라면

비로서 그때,

기독교인으로서의

‘진리안에서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기독교 2천년역사를 지탱한

인간적 조건이 바로

그 ‘자유’ 였다. 


  바울의 전도여행


5. 주후49년에서 57년사이.

이 기간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기간이다.

시기적으로

‘기독교’ 가 탄생된 중요한 기간이기도 하다.

 

비로서

이 기간을 거치면서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인식되었던

원시교회가

그 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한게

바로 이 기간이다.

 

그 중심에

사도바울이 있다.

 

사도바울 사도바울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던 바울은

사실상의

기독교창시자 이기도하다.

 

예수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었다.

 

안디옥에서 있었던

베드로와의 충돌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율법과 믿음’ 의 진검승부 라고 할수있다.

 

바울은 스스로를

율법을 지키는데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는

히브리인중 히브리인으로

율법에 정통한

철저한 유대교 신자였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수준높은 이해는

기독교 신앙이

율법과 결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게 사실이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종파에서

독립하기는 어려웠을수도 있었다.

 

  갈라디아서

 

6. 갈라디아서.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가장먼저 쓰여진 책이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전서 다.

 

나는 개인적으로

갈라디아서가

더 먼저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이며

평생을 통해

갈라디아서를 연구해왔다.

 

아마도

갈라디아서는 주후50년경,

에베소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60년대에 쓰여진것을 생각하면

10년의 차이가 있다.

 

갈라디아서의 내용적 핵심은,

율법과 믿음의 문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중심의 기독교공동체는

이방인

기독교인에 대해

율법의 준수와 할례를 요구한다.

 

일부지역에서

성인이 할례를 시행하다

위생적인

이유로 죽는경우까지 있었다.

 

바울의 강력한 주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교인들에게

율법은 적용될수 없으며

더더구나

할례의 요구는 있을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울의 신념적 주장은,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몽학선생’ 이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율법의 준수를 전제로는

구원받을수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기도 하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믿음’ 이며,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저질수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부르며,

이신득의(以信得義) 라고도 부른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모든

기독교인들은,

갈라디아서 2장 16-21절을

암기할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어떤것인지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당시의 구호,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를

여기에

근거해서 강력히 주장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와 함께

복음서의 오리지날인 마가복음을

생명의

양식으로 알고 읽어야 한다.

 

성경은

자기가 스스로 읽어야 한다.

 

특히

갈라디아서는 

6장밖에 안되는

짧은글이기 때문에

단번에 다 읽어야 한다.

 

마가복음에 정통하면

마태와 누가에 얼마나 많은

구전적

군더더기들이 붙어있는지를

저절로 알게된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씀은,

그 20%정도만이

주께서 직접하신 말씀임은

이미

신약학계가

당연하게 인정하고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신앙생활


7.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다 알것같은데

대답하기 어려운게 이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할수 있다면

그건 이미

상당한 신앙적수준에 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 질문은

우리모두에게

어려운 질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모든 질문에는 답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물리적 으로는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것을 아는것이다.

 

말하자면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

나를

지켜보기 있음을 아는것이다.

 

하나님의 눈

 

보통사람과

신자의 근본적인 차이의 하나가

바로 이점이다.

 

다음은

그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정신,

예수의 마음,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있어야 된다.

 

예수에 대해 아는것과,

예수를 아는것이

얼마나

다른것 인지를 모르면

불가능한 생활 이기도 하다.

 

예수를 알기위해서는

직접, 적극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66권을 다 읽고,

심지어는

노트북에 옮겨썼다해도

인간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도로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를 만나는길은

성경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

굿같은

부흥회에서 감격적으로 만난건

카타르시스의

‘자기’ 임을 알아야한다.

 

예수는

그런곳에는 계시지 않는분이다.

예수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일상안에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일상에 없는것은

그게무엇이든 거짓이다. 

  신앙 상태


8. 바로메타-barometer.

사물의 수준이나

상태를 아는데 기준이 되는것,

그게 바로메타다.

 

나 스스로가

내 신앙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수는 없다.

 

아무도

거울이 없으면

자기얼굴을 보지못한다.

 

이때는

 

그 거울이

나를 아는 수단이 되는것이다.

내가

내 신앙수준에 대해 알려면

다른사람을 통하는 방법이 있다.

 

타인, 즉 남이

어떤모습으로 보이는가를 점검해 보는것이다.

무관심하게 보는경우가 대부분이며,

어떤때는 경쟁자로,

또 어떤때는

적으로 볼수있는게 타인들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인은,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라 하는분을

따르는 자들은

타인이 ‘이웃’ 으로 보여야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을

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선물로 받은

탈란트에 따르면 된다.

 

모두가 똑같을수도,

똑같을필요도 없다.

서로다른것이

그 다양성 때문에 더 효율적이다.

 

공통점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모두가 서로다르지만,

함께

선한사마리아사람’ 이 되는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다른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그 안에

내 신앙상태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 있다.

 

왜 주께서

선한사마리안사람에 대한

예화를 말씀하셨는지

늘 명상해야한다.

 

그게 누구든

먼저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할수 없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다. 


 
신앙의무

 

9. 의무-義務.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 의무다.

 

따라서

신앙적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무이기도 하다.

 

지금의 교회가

본래의것과 비교할 때

전혀 딴것이 된것은,

인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모두는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교회라는

보이는 조직을

움직이는 인간의 대부분은

우리사회에서 삼류들이다.

 

무인가

불법신학교가 쏟아내는 불량인력이

교회를

어느정도로 훼손했는지는

그 정도를 알수가 없을정도다.

 

  신앙의무

 

이만열교수의 지적대로

자기의 깊은병에 대해

그것을

진단할수있는

자정능력이 상실 된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와같은

혼란과 타락, 부패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의

긴 역사를 통해

교리 때문에

벌어진 전쟁만도 부지기수다.

 

그때마다

교회를 지키고

신앙을 물려준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가 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알았던 것이다.

그게

신앙적 의무다.

 

그 신성한 의무는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되고있다.

 

그래서

보이는것과 보이지않는것을

구분하는

신앙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

 

  신앙 안목

 

오늘,

서문에서부터 의무까지 

10가지 키워드로

설명을 시도한것은,

 

우리앞에 주어진 문제들을

단순화하고, 쉽게 풀어감으로서

이해를 증진시키고,

 

무엇보다

명료하게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출처 : 에스더와 별 의. 스위시 맥스 공부방.
글쓴이 : 에스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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